오성균 (카피라이터)
요즘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영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시점에 새삼 어버이날을 보내고, 우리들의 엄마에 향긋한 삶과 자식으로 엄마을 진정 부탁하고픈 마음에서 이소설을 읊조림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70여 생애를 오직 가족들만 위해 살아왔던 한 어머니가 생일을 지내기 위해서 서울의 자녀 집을 방문했다가 서울지하철역에서 잃어버려지는데서 시작합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실상 모든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주는 존재이지 스스로 잃어버려지는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식구들마다 집안에서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되면 다들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내 청바지 못 봤어? 여행 가방은? 반창고 좀 찾아줘요. 혹시 내 지갑 못 봤는가? 우산 어디 있지? 제 기억에도 모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최종 검색은 항상 엄마를 향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형들이나 누나,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그랬지요. 그래도 엄마는 왜 그런 걸 나한테 묻느냐고 역정 내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셨지요. 그리고는 신기하게도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다 찾아 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내시는 분이 잃어버려질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엄마는 항상 그곳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흙속의 흙처럼, 먼지속의 먼지처럼, 거미줄속의 거미줄처럼”말이지요. 모든 식구들의 의식 가운데 정물처럼 자리 잡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항상 그곳에 있는 그 모습입니다. 위치도 모양도 달라질 수가 없지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분은 항상 그곳에 그 모습으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마치 유년시절도, 소녀일 때도, 처녀일 때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엄마였던 것처럼 그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꿈이라든가, 소망, 추억, 자신만의 욕망이나 감정, 이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로 말이지요. 그래야하는 엄마가 잃어버려지면서 비로소 찾아지기 시작합니다.
식구들의 기억 속에 단편적으로 부유하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모자이크처럼 짜 맞추어지면서 엄마의 소녀시절, 엄마의 외로움, 엄마의 고통, 엄마의 슬픔, 엄마의 사랑, 엄마의 꿈들이 모아져서 한 여인으로 복원됩니다.
실제로는 잃어버린 채로 끝나버리지만 식구들의 의식 속에서 엄마가 되찾아지면서 그 엄마 앞에서 식구들은 다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나는 과연 어떤 아들이었는가, 어떤 딸이었는가, 또 어떤 남편이었는가.
신경숙은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잃어버리기 전에는 찾을 수 없는가라고. 실제로 잃어버려져서 거리를 떠도는 엄마들도 더러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어쩌면 잊혀져버린 것은 아닌지요. 잊혀져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이 결국은 마찬가지인 것을요. 백만의 독자들 중 대부분은 잊어버림으로 잃어버렸을 엄마에 대한 회한으로 이 책의 값을 기꺼이 지불했을 것입니다.
꺼이꺼이 울면서 엄마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겠지요. 다음 돌아오는 어버이날, 아니, 오늘부터 더 많은 아들딸들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십자가의 고통을 지불하고 내려진 아들의 몸을 품에 안은 성모의 모습이 클로즈업 됩니다. 그 품에서 태어나 그 품의 젖으로 양육되고, 다시 그 품으로 돌아가 안식할 수 있는 엄마의 품은 정녕 하늘이겠지요. 엄마를 찾으면 나를 찾고, 또 하늘을 찾을 수 있나 봅니다. 멀리 시골에 계신 엄마를 어버이날에도 찾아뵙지 못한 우리에 변변치 못한 자식들은 그저 전화만 드립니다. “엄마 죄송해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읊조립니다, 하늘을 향하여 “ 엄마을,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