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기 (공인중개사·본지 부동산전문위원)
한강 흐름의 한복판에 넓게 퍼진 백사장이 있었고, 이 넓은 백사장 안에 두 개의 섬이 있었다. 원래 여의도와 밤섬은 서로 붙어 있었는데, 큰 홍수로 갈라져서 두 개의 섬 중 서강 쪽은 밤섬, 영등포 쪽은 여의도 섬이 됐다. 과거 여의도에는 나라의 중요한 목장이 있었으며, 조선말까지도 주민이 없어 근처의 밤섬이나 마포 사람들이 건너와 땅콩 등을 심어 거둬 먹었다.
이 모레 섬이 1916년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으로 개발됐고, 1929년에는 만주-여의도-도쿄 항공 노선이 취항하게 됐다. 또한 여의도는 한국 공군의 발상지였고, 6.25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여의도 기지에 공군 작전 지휘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그 후 여의도-마포-영등포 간에는 미군이 한국 전쟁당시 사용했던 대형 고무보트를 매달아 나무판자를 엮어 올려놓은 가교를 이용했다.
1968년 발표된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노래 가사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하다”라고 고요 속에 메아리처럼 저녁의 여의도는 참으로 아득하고 외로운 섬으로 보여 졌을 것이다. 1968년 한강 본류의 넓이를 확보하고, 토석을 활용하고자 밤섬을 폭파해 윤중제 제방에 사용됐다. 여의도는 그야말로 군인 정신으로 110일 간의 혈투로 준공됐다.
8.4㎢(254만평)의 평지가 조성되고, 그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계획한 길이 1.35km, 넓이 280~311㎡, 40만㎡(12만평)이 5.16 광장으로 명명되었는데, 이 후 자전거타기로 유명했던 여의도 광장으로 다시 여의도 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실은 이 광장이 비상 군사용 비행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1971년 재일 교포가 벚꽃나무 2,400주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한 공무원의 발상으로 이 벚꽃을 여의도에 심게 됐다. 이것이 상춘의 대명사인 여의도 벚꽃 명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1971년도에 완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중앙 공급방식의 난방과 엘리베이터가 달린 고층 아파트로서 국내 최초였다. 그리고 여의도 발전의 결정적인 계기는 증권거래소와 증권협회의 입지결정이었다.
증권거래소가 1979년 7월에 개소되었는데, 여의도가 대한민국 금융증권소의 중심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또한 1987년 6월에 준공된 쌍둥이 빌딩은 63빌딩과 더불어 여의도 고층건축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한국 건축수준을 전 세계에 과시한 기념비적 건축물이 됐다.
국회의사당은 국회의사당의 존엄성 등의 이유로 높이가 서쪽 주변은 낮고, 건너편은 높은 동고서저 현상을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정치의 일번지로서 새싹이 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여의도는 한강 르네상스 일환인 ‘한강 공공성 회복선언’과 함께 높이 완화 구역으로 지정한데 이어 층수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또 제1기 신도시의 아파트 주거 부분을 최고 50층 내외까지 재건축해 최고층 아파트로 재탄생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 뒤편의 요트 기지 시설이 축구장 2.5배(약1만4,600㎡)로 공사 중에 있다. 이러한 면적은 요트 80척이 접안할 수 있으며, 서울시에서 산업뉴타운 사업으로 여의도 금융지구에 국제금융센터 조성 등 동북아 금융거점 도시로 육성 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의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인 여의도를 만들기까지 이곳에서 배고픈 정신으로 피와 땀으로 일궜던 값 비싼 우리 아버지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현재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금융과 정치 일번지로서 변화와 상징적인 역할을 해 주는 새로운 여의도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