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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큰 길,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한 충정

관리자 기자  2010.09.15 15: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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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창설 70주년>

 

 

전성호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6.25전쟁 60주년, 경술국치 100주년 등 국가보훈과 관련해 유난히도 굵직굵직한 기념일이 많은 올해,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기념일은 한국광복군 창설 70주년이 되는 9월 17일이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위원장 김구’ 명의로「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해 광복군 창설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이후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함으로써 마침내 광복군이 창설됐다.
총사령부 성립예식에서 발표된「총사령부성립보고」에서 “한국광복군은 일찌감치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 시에 곧이어 성립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이 우리 국군을 해산하던 날이 곧 우리 광복군 창설의 때인 것이다”라고 천명했 듯 그 기원을 대한제국의 군대에 두고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을 계승함을 분명히 밝혔다. 해산 후 의병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한제국 국군을 계승했음을 선언함으로써 민족사의 군맥이 단절되지 않았다는 자주 의식과 함께 광복군이 민족사의 맥락을 이은 민족의 군대임이 강조됐다.
그리고 광복군의 창설은 독립군의 맥락을 이은 것이기도 하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독립군의 전투역량, 작전, 지휘, 조직 등을 한단계 더 발전시킨 것으로 인식했으며, 광복군의 핵심 간부들은 만주 독립군 출신으로 항일전투역량이 풍부한 무장들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연합국과의 군사합작 및 공동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전후 발언권 강화를 높이고자 미군과의 군사합작을 중시해 한미공동작전과 그를 통한 국내진입작전을 진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행단계에 접어들 무렵 일제의 갑작스런 무조건 항복으로 한미공동작전은 좌절됐다.
30명으로 창설된 이래 열악한 물적·인적 기반과 중국이라는 타국 영토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제약 하에서도 광복 전후 1천여명 가까운 무장세력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열강이 임시정부를 외면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려고 노력했으며, 나아가 국내 진입작전을 시도한 것은 그것의 규모나 성공 여부를 떠나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자주적 독립의지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