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현 정 (서울지방보훈청 혁신기획계)
얼마 전 출근길에 가지만 앙상히 뻗어있던 청내 목련 나무가 어느새 하얀 옷을 입고 봄빛에 반사되어 멋들어진 모습을 맘껏 뽐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 추운데 벌써 꽃이 폈나…’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봄이 왔다는 소식에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업무를 시작하려던 중 인터넷에서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생 4명 중 1명 4.19혁명 몰라…” 4.19혁명 기념일을 2주정도 앞두고 있던 터라 그 글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47년 전 60년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 알 순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불굴의 역사를 창출해 낸 중요한 사건이 잊혀져 간다는 생각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4.19 혁명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민주화를 위해 항쟁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입장이 48.4%, 항쟁하지 않겠다, 관심 없다는 입장이 51.6%였다. 가슴속에선 48.4라는 숫자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나의 입장 또한 의심스러웠다. 그때 당시 혁명을 일으켰던 시민들의 대부분이 학생들이었고, 그들의 피의 노력으로 역사가 다시 쓰여 지게 된 사건을 지금의 학생들이 모르거나 관심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유·초년시절, 4.19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TV에서 가끔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화질이 결코 좋지 못한 흑백화면 속 그의 말투와 이미지는 그리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그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6.25사변으로 인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정치적 대립이 일어나면서 그는 반공정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10여년 동안의 대통령 역임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법치주의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정권의 존립 기반이나 정당성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를 위한 반공주의였지만, 그마저도 정권의 유지를 위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에 더 이상 참지 못하여 항거 하였고, 지금의 4.19혁명 기념일을 만들어 내었다.
한 사람의 잘못 된 정치는 시민들의 분노를 이길 수 없었고, 역사는 투쟁하는 자들의 몫이 된 것이다. 무관심하게 4월 19일을 보낼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선조들의 자유민주주의 갈망과 뜨거운 혁명적 사기를 지금의 우리가 잘 알고 배워서 또 다른 역사를 창출해 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