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칼럼] 소통부재 시대에 진정 통하는 말씀

관리자 기자  2011.05.12 17:15:53

기사프린트

카피라이터 오성균

 

소통부재의 시대. 부부, 부모와 자녀, 계층·지역 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소통부재는 심각한 부작용들을 가지고 온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말이 통하지 않고, 생각이 통하지 않고, 심정이 통하지 않고, 진심이 통하지 않고, 의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불신과 이해, 충돌과 단절, 혼란과 왜곡이다. 이해와 타산이 서로 부딪혀 충돌하고 피 튀기며 싸운다. 양보와 타협이 없다. 무한 충돌이다. 충돌이 버거워 피해버리면서 외톨이가 된다.

 

동반자살이 유행이다. 인터넷의 자살사이트에서 만나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것인데 죽음이란 대가를 지불하면서 마지막으로 단절로부터 벗어나 소통해보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터넷 공간은 소통의 공간이다. 그런데 아무런 안전장치나 가이드라인도 없는 무한의 소통 공간이다 보니 오히려 소통의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돌연변이에 대한 것들이 한 주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다. 제일 먼저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 송아지만한 쥐다. 중국의 어느 학생이 프로젝트로 만든 모형인 것으로 드러났다. 길이 1미터짜리 지렁이는 호주와 남미에서 현재도 발견되는 원래 있는 종이란다. 원산지 허위 표시에 속은 것이다. 4미터짜리 메기는 정상 발육이란다. 2-3미터 정도의 메기는 영국 등지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단다. 민물고기 중 최상위 포식자인 메기는 사람이 손대지 않으면 계속 자랄 수 있다. 체르노빌 인근은 수십 년 동안 사람의 인적이 끊어진 곳이니 만큼 오히려 메기에게는 크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거짓을 누가 의도적으로 사진까지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소통의 바다에서 오히려 소통이 가로막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수의 의도된 거짓에 다수가 무방비상태로 속아 넘어가고 결과적으로 집단적 오해와 왜곡이 가능하다는 것이 섬뜩하다. 이럴 때는 누군가가 나서서 모두에게 통할 수 있는 권위와 진실로 공동체 가운데 소통이 가능하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참된 권위가 없는 것이 또한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대통령이란 말은 한자로 풀이하면 크게 통하는 령인데 지금은 대통령의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각자 살벌하게 자기의 목소리만 높일 뿐 경청도, 대화도, 타협도, 소통도 없는 혼란과 충돌과 단절과 왜곡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누군가 난 이 동네에서 통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동네에서는 그 사람을 알아준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인정받고 있고, 그 사람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그 사람의 의중대로 되어 진다. 이런 말이다. 공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간도 그렇다. 날이 날에게 말하고 밤이 밤에게 지식을 전달한다고 했다. 날이 무슨 말을 하며 밤이 무슨 소리 정보를 전달하랴. 하지만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신랑이 신방에서 나오는 것에 비유했다. 첫날밤을 신부와 함께 보내고 행복에 겨워 활짝 웃으며 신방을 나서는 신랑의 얼굴처럼,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해가 온 종일 진행하는 모습이 마치 장사가 달음질하는 것 같다. 경주에서 승리한 챔피언이 자랑스럽게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다.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해도 우주만물 운항에 뜻대로 운행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것이다. 그 소통의 결과가 질서와 조화다.

 

그런데 그런 소통이 안 되는 유일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인간이다. 대통령과 민초들, 가정에 가장과 자녀들, 부자와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 가칭 이름하여 보수와 진보들, 흔이들 이야기하는 성장과 복지을 각각 주장하는 의원님들.

 

제러미 리프킨이라는 사회학자가 있다. 행동하는 철학자,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석유문명의 파국적 미래를 예측한 엔트로피라는 책을 썼고, 기계문명의 발달이 일자리를 다 빼앗아 갈 것이라는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도 썼고, 소유의 종말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한계를 말한 인물이다. 이 분이 이번에 공감의 시대라는 책을 썼다. 현대의 위기를 물질의 문제가 아닌 공감부족의 문제로 봤다. 인간을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동물로 보지 않고 공감의 동물로 이해한다. 소유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통해서 서로 협력하고 이해할 때 인간은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감확대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소통이라고 한다. 소통하면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하면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러면서 거울신경세포이론, 혹은 공감뉴런이란 이론을 소개하는데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느낌을 자신의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기재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팔뚝에 거미나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면 보는 사람의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내 것으로 시뮬레이션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어둡고 죄악 된 사람과 소통할 것이 아니라 밝고 행복한 사람과 소통하면서 그 행복을 내 것을 공감해 나가야 할 것이다.

 

 

소통부재로 외롭고 답답한가. 부부사이가 막혀 있는가. 자녀들과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가. 사업이 막혀서 길이 보이지 않는가. 인간관계가 단절되어 고통스러운가. 어디서부터 뚫어나가야 할까. 소통은 부단히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인내하라. 그렇지 않으면 소통하기가 힘들어진다. 남에 말은 5분 듣고 내말은 1분 전하는 피눈물 나는 훈련이 필요하다. 실전에서 훈련만큼 좋은 교과서는 없다.

 

국악 창에서 뒤에서 얼쑤 하는 고수에 추임새가 창하는 소리꾼에 흥을 돋구고 더욱 창 마당을 재미있고 구성지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부부 사이에도 적용해보자. 아내는 즐겁게 조잘대고, 바깥양반은 열심히 듣고 얼쑤 추임새를 넣어주는 부부사이, 대통령과 민초사이, 여와 야 사이, 보수와 진보 사이 , 이런 사회가 행복하고 진취적 국가로 가는 바로미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