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신문=변윤수 기자] 지난 1일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마산리.
영일만 바다와 맞닿은 야산은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9월 초가 아니라 11월 중순에 봤다면 나무에 단풍이 든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다.
벌겋게 물든 나무의 정체는 소나무재선충병으로 말라 죽은 소나무.
6일 포항시 등에 따르면 포항에서는 2004년 북구 기계면 내단리에서 소나무재선충병이 처음 발견된 이후 계속 확산하고 있다.
소나무재선충병뿐만 아니라 다양한 병해와 염해, 산불 등으로 소나무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소나무가 사라진 자리에는 수종 전환 방침에 따른 활엽수가 주로 심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세월이 흐른 뒤에는 국내에서 소나무를 보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 포항·경주 등 6개 시·군 소나무재선충병 피해 극심
소나무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친숙한 나무다.
애국가 2절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란 가사나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란 옛말이 있을 정도로 전국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다.
궁궐이나 한옥 주요 자재로 사용됐고 사계절 푸른 덕에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로 그림 소재로도 애용됐다.
그러나 이런 소나무가 병해와 염해 등으로 갈수록 줄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소나무재선충병 때문이다.
소나무재선충병으로 고사한 소나무는 포항 남구 동해면 발산리, 대동배리, 호미곶면 대보리, 장기면 신창리, 수성리, 두원리 등 포항 전역에서 볼 수 있다.
고사한 상태에서 제거작업이 늦어지다가 보니 잎이 다 떨어지고 줄기와 가지가 잿빛으로 변한 나무도 많았다.
이런 상황은 포항뿐만 아니라 경주, 영덕 등 경북 전역이 비슷하다.
도내에서는 울릉만 소나무재선충병이 발생하지 않았을 뿐이다.
전국적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소나무재선충병은 갈수록 더 크게 번지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소나무재선충병 감염이 확인된 소나무류는 149만그루다.
특히 포항, 경주, 안동 등 영남권 6개 시·군은 소나무재선충병 피해 극심 지역으로 분류됐다.
◇ 기후변화의 그늘…재선충병 매개충 활동시기 장기화
소나무재선충병이 확산하는 것은 기후 변화와 관련이 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비교적 따뜻한 겨울이 이어지면서 소나무재선충병을 일으키는 솔수염하늘소 생존율이 높고 활동 시기도 길어지고 있다.
포항시 관계자는 "소나무재선충병을 일으키는 매개충 우화(성충이 됨) 시기가 갈수록 빨라져서 방제 시기를 매년 10월에서 9월로 앞당겼다"며 "현재 포항의 소나무재선충병 피해는 추정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고 말했다.
각 지자체는 소나무재선충병이 처음 발견됐을 때만 해도 해당 고사목을 제거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소나무재선충병을 옮기는 솔수염하늘소가 주변 나무로 이동하면서 피해가 줄지 않았다.
재선충병 매개충인 솔수염하늘소는 바람을 타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기도 한다.
그러다가 보니 육지와 간격을 두고 바닷가에 떨어진 바위인 포항 남구 장기면 신창리 일출암 소나무도 지난해 재선충병에 걸려 제거됐다.
이에 지자체는 더 많은 예산을 들여 소나무재선충병으로 말라 죽은 나무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감염 가능성이 큰 주변 나무까지 없애는 방식으로 방제했다.
또 피해목 수집과 파쇄를 확대하고 예방주사를 놓거나 약제를 뿌려 피해를 줄였다.
이런 방식은 한때 효과를 보는 듯했다.
포항에서 발생한 소나무재선충병 피해 고사목은 2017년 10만6천여그루에서 2022년 1만5천그루로 줄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포항 일대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소나무재선충병과 염해 등 복합적 원인으로 말라 죽는 소나무가 늘고 있다.
포항과 인접한 경주시도 상황이 나쁘기는 비슷하다.
경주시는 올해 소나무재선충병 피해목 약 24만 그루를 제거했다.
또 506㏊ 면적에 소나무재선충병 예방주사를 놓고 특별방제구역인 감포읍에는 수종을 전환하기로 했다.
◇ 염해·깍지벌레·산불도 피해에 한몫
포항 해안에서는 염분에 의한 피해, 즉 염해로 죽은 소나무도 많다.
소나무깍지벌레 역시 소나무를 고사하게 만드는 한 원인으로 꼽힌다.
이와 함께 매년 되풀이되는 대형 산불도 소나무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소나무는 많은 나무 중에서도 산불에 특히 취약한 종류로 꼽힌다.
소나무 송진은 테라핀과 같은 정유물질을 20% 이상 포함해 불이 잘 붙고 오래 타는 특성이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나무는 활엽수보다 1.4배 더 뜨겁게 타고, 불이 지속되는 시간도 2.4배 더 길다.
이 때문에 산불에는 소나무가 가장 취약한 나무란 평가를 받는다.
올해 3월 경북 북부 일대를 휩쓴 초대형 산불이나 2022년 3월 울진을 비롯한 동해안 산불의 피해를 키운 한 원인이 소나무가 많은 탓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산림청 임업통계연보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경북 소나무(소나무·해송) 숲 면적은 45만7천902㏊로 강원(25만8천357㏊), 경남(27만3천111㏊)보다 훨씬 넓어 전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산림 면적 중 소나무 숲이 차지하는 비율도 약 35%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 소나무 솎아내고 활엽수 심어야 하나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불에 약한 소나무를 솎아내고 불에 강한 활엽수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온다.
이미 각 지자체는 새로 나무를 심을 때 소나무류를 안심은 지 오래됐다.
포항시 관계자는 "포항에서는 소나무 조림을 하지 않은지 20년 정도 됐다"며 "현재는 소나무를 제외한 다른 나무를 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병두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재난·환경부장은 "소나무가 국내에 잘 적응한 수종이지만 불에 잘 타는 단점이 있다"며 "소나무는 죄가 없는 만큼 주택가나 발전소 주변 등 지켜야 할 대상 주변에 있는 소나무만 솎아베기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문가 사이에서는 국내 산에서 소나무를 줄이자는 의견과 소나무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뉜다.
다양한 이유로 소나무가 줄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소나무를 찾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돈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는 그동안 언론 인터뷰를 통해 "소나무 수가 줄도록 놔두고 그 자리를 상대적으로 산불에 강한 활엽수가 자연스레 채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강호덕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 교수는 "소나무는 우리나라 정기가 살아 있고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당연히 연구를 통해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