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갑호를 아십니까?
과거 1960~70년대 영등포에서 가장 큰 아니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을 기업인 방림방적의 창업주가 바로 서갑호이다.
서갑호는 1915년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마친 후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오사카에 정착하게 된다. 가난한 식민지 출신 청년에게 일본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한게 아니었다. 밥 굶기를 끼니 때우듯 하던 서갑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특유의 명석한 두뇌와 세상을 읽는 눈을 통해 전쟁 중의 일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군수물자이고, 그 중 가장 소모성이 크고 민군겸용이 가능한 것이 군복임을 깨닫고, 서갑호는 막노동을 통해 모은 돈을 투자하여 비록 가내공업 수준이었지만 사카모도(판본:板本)방적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은 서갑호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다 주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갑호의 판본방적은 더욱 번창하여 오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지방 내에서 모든 일본인을 물리치고 개인 소득세 1위를 독차지 하였으며, 전 일본 내에서도 마쓰시다에 이어 4~5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래서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관동의 신격호(현 롯데 회장), 관서의 서갑호라 하여 신화적인 인물로 세간의 회자가 되었다.
이처럼 일본 내에서 엄청난 부를 쌓아온 서갑호이지만 그는 결코 그의 뿌리인 조국 대한민국을 잊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여 정식 국교 수립을 하지는 않았던 이유로 일본에 대사관이 아닌 주일 대한민국 대표부를 설치하였으나, 가난한 대한민국은 일본 내에 대표부 건물을 설치할 자금 여력이 없자 서갑호는 사비를 들여 동경에 건물을 매입하여 무상으로 대표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1961년 5.16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건설을 위해 재일교포인 서갑호에게 국내 투자를 권유하였고, 서갑호는 영등포에 14만 추에 달하는 판본방적 (1967년에 방림방적으로 개칭)공장을 건설하였다. 전쟁의 참화로 더욱 피폐해진 대한민국에서 방림방적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고, 영등포가 대한민국 섬유산업의 메카로 불리게 되었던 것도 바로 방림방적이 그 시초를 이루었다.
특히 서갑호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과거 주일대표부로 사용하던 건물을 아예 국가에 기증하여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사용토록 하였다. 그 땅은 당시 시가로 따져도 약 600억원에 달할 정도였다.
나아가 서갑호는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1973년 경북 구미에 대규모의 윤성방직 공장을 설립하였으나 그만 대 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공장과 원자재가 불에 타는 엄청난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박정희 대통령은 윤성방적의 회생을 위해 국가가 나서 지원을 하고자 하였으나 때 마침 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로 인해 그 뜻이 무산되었으니 하늘의 뜻을 인간이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윤성방적의 화재로 인한 엄청난 손실은 결국 서갑호를 파산으로 몰고가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서갑호는 1976년 쓸쓸히 눈을 감았다. 그 이후 서갑호는 일본 내 대사관 입구에 대사관 부지를 기증해준 은인으로 비석하나만 남기고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자랑스런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수많은 호국 영령들의 뜻을 새기고,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함으로써 위대한 조국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다짐을 되새기는 시기이다.
대한민국!
이제 세계인은 세계 11위의 무역 대국, 36년간 일본의 식민지배하에서 벗어난지 불과 70년, 동족상잔 전쟁의 폐허에서 우뚝 서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룬 나라로 대한민국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안길에 조국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영달을 뒤로한채 쓸쓸히 사라져간 수 많은 애국자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우리는 잊은 채, 이념으로 갈리고 사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거리로 뛰쳐 나서는 것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언젠가 죽어 저승에 간다면 그분들을 뵐 면목이 없다.